비가 내린다. 벛꽃 피어나는 석촌호수에 봄비가 내린다. 2호선 잠실역을 지나 봄비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린다. 우산 위로 또르르 빗물이 구른다. 우산 뒤로 서러운 빗물이 떨어진다. 헤어진 연인이 그리워 말없이 홀로 걷는 남자의 등 뒤로 서러운 빗물이 흐른다. 암으로 아빠를 먼저 떠나보낸 긴 머리의 여인 어깨 너머로 눈물보다 더 진한 빗물이 흐른다.
석촌호수는 비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서러운 자들의 아픔을 씻어주려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하나하나 감싸주려고 석촌호수는 비를 간절히 초대했다. 호수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한 봄비는 연인들의 발끝에 구부정하게 걷는 노인의 허리 맡에도 골고루 스며들었다. 무심한 듯 호수를 걷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촉촉히 적셔 주고 있다.
연인을 잃은 외로움에 서러운 비를 맞고 있던 청년의 눈은 천천히 젖어 갔다. 빗물에 눈이 적셔진 청년은 아무 생각없이 걸었고 무심히 호수를 바라보던 여인과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을 비켜 섰다.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여인은 표정도 눈길도 관심도 없이 다시 다른 쪽으로 비켜섰다. 그저 비에 젖은 바닥만 바라보던 청년도 다른 쪽으로 비켜섰다.
두어번을 비켜서는 방향이 엇갈리자 그제서야 서로 바라보았다. 그렁그렁한 청년의 눈은 금새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고 축 쳐진 어깨에는 벌써 빗물이 들어차 있다.
바람이 분다. 왕벛나무의 벛꽃 흔들리는 바람이 분다. 긴 머리가 여인의 얼굴을 가리운다. 머리를 쓸어 넘어 넘기던 여인은 그제서야 청년의 아픔을 본다. 그대는 어이하여 서글픈 비를 맞고 있나요?
석촌호수 연결통로에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바라보는 엄마는 아이의 실력이 기특한지 사진을 찍어 주면서 아이의 인생 한 페이지를 추억해 주고 있었다.
아이가 치던 피아노 곡이 무엇인지 모른다. 연결통로를 지나던 사람들은 아이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눈길 한번 주고는 그저 제 갈길을 간다. 눈물 그렁하던 청년과 머리 쓸어 넘기던 여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엇갈리던 길을 비켜주려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 잠시 감상하고 있었는지 모는다. 그들에게 아이의 피아노 곡은 사랑의 세레나데 였을 것이다.
비 내리는 석촌호수의 공기는 무거웠다. 햇빛 찬연하던 호수의 맑은 공기가 아니었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가득했고 왕벛나무 머리결에 스치는 바람도 스산했다. 호수를 지나는 사람들도 모두 마스크에 얼굴을 숨기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청년이 공기의 무거움을 이겨내며 빗줄기의 서러움을 털어내며 먼저 웃었다. 슬픈 웃음이다. 등줄기에 맺혀진 서러움과 어깨 너머 젖은 아픔을 모두 한 번의 웃음으로 괜찮다는 듯 보여 주었다.
여인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당신도 나만큼 슬프군요. 이 길을 같이 걸을 사람 없이 서럽고 아프군요.
길을 걸었다. 한 방향을 보고 나란히 걸었다.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벛꽃 길 오른편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가득 피어 있고 호수 쪽으로는 왕벛나무가 벛꽃을 환하게 피어내고 있었다. 빗물을 머금은 꽃들은 서로 활짝 피어나 모처럼 생기 가득했으며 세상을 더 환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비가 오는 석촌호수는 상쾌한 모습이다. 우산 속 사람들은 비를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재잘거리며 웃고 깡총거리고 서로 사진 직어 주기에 바쁘다. 빗줄기가 우산 뒤 등위로 떨어져도 아이들은 가족과 모처럼의 나들이가 마냥 좋다. 청년과 여인은 나란히 걸으며 인파 속 어딘가로 조용히 묻혀 갔다.
봄비가 내린다. 봄을 알리는 비다. 세상을 촉촉히 적시며 꽃들을 더 화사하게 만드는 행복한 비다. 롯데월드 타워 옆 석촌호수가 봄비를 간절히 기다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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